사이토 다쓰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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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토 다쓰오키는 1561년 아버지 사이토 요시타쓰의 뒤를 이어 미노국의 다이묘가 되었으나, 무능한 통치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하다 1567년 패배하여 추방되었다. 이후 나가시마,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의탁했으며, 1573년 도네자카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는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이나바야마성 공략으로 인해 사이토 씨족은 몰락했다. 다쓰오키의 생존설과 관련하여 엣추 지역의 전설과 하시마의 전승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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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쓰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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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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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이토 다쓰오키 / 잇시키 다쓰오키 |
개명 | 기타로 (유년 시절 이름) 사이토/잇시키 다쓰오키 요시무네 요시노리 또는 요시타다 |
이명 | 우효에다이부, 지부다이스케 |
사망 | 1573년 9월 6일 |
사망 장소 | 도네자카 전투, 에치젠국 |
묘소 | 조자이지 (기후현기후시) ※ 위패만 존재 |
계명 | 즈이코인 류엔 소운 닛슈 다이코지 |
씨족 | 사이토 씨, 잇시키 씨 |
관직 | |
관위 | 우효에다이부, 지부다이스케 |
가문 | |
가문 | 사이토 씨 |
가몬 | [[File:Nadeshiko inverted.png|15px]] |
생애 | |
출생 | 1548년 |
사망 | 1573년 9월 6일 |
아버지 | 사이토 요시타쓰 |
어머니 | 아자이 씨 |
주군 | 아시카가 요시테루 아시카가 요시아키 아사쿠라 요시카게 |
주요 전투 | 이나바야마성 전투 (1567년) 도네자카 전투 (1573년) |
소속 | 사이토 씨 |
역할 | 다이묘 |
재임 시작 | 1561년 |
재임 종료 | 1567년 |
이전 | 사이토 요시타쓰 |
2. 생애
사이토 다쓰오키는 1561년 13세의 나이로 아버지 요시타쓰의 뒤를 이어 사이토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나 할아버지 사이토 도산과 달리 유능한 통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독 상속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격렬한 경쟁 관계에 놓였고, 1567년 이나바야마 성 전투에서 노부나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이 패배로 사이토 가문은 센고쿠 시대의 권력 투쟁에서 주요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성이 함락될 당시 다쓰오키의 행적에 대해서는 최소 두 가지 설명이 전해진다. 하나는 노부나가의 최후 공격 전날 밤 성을 버리고 배를 타고 나가라강을 따라 도주했다는 설이다.[1] 다른 하나는 성문이 돌파된 후 히데요시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여 가솔들과 함께 성을 나섰다는 설이다.[2]
성을 나온 다쓰오키는 이세국의 나가시마로 피신하여 잠시 망명 생활을 했다.[3] 이후 기나이 등지에서 미요시 산닌슈와 같은 반 노부나가 세력에 가담하여 저항을 시도했으나 세력 회복에는 실패했다. 결국 에치젠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의탁하였고, 1573년 도네자카 전투에서 아사쿠라 군 소속으로 싸우다 2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1][4]
2. 1. 가독 상속
덴분 16년( 1547년 ) 또는 17년( 1548년 )에 사이토 요시타츠와 그의 아내 아자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아자이 씨는 아자이 히사마사의 딸로 알려져 있지만, 나이를 고려하면 아자이 스케마사의 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에이로쿠 4년( 1561년 ) 5월 11일, 아버지 요시타츠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4세의 나이로 미노 사이토 씨의 가독을 상속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사이토 요시타츠나 할아버지 사이토 도산과는 달리 유능한 통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독을 상속한 지 불과 이틀 뒤인 5월 13일, 요시타츠의 위독 소식을 들은 오다 노부나가가 기소가와를 건너 미노 서부로 침공해 모리베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모리베 전투 ). 이 전투에서 사이토 가문의 중신이었던 히비노 키요자네, 나가이 모리야스 등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노부나가 본인은 철수했지만, 오다 가문의 주둔군에 의한 공격은 계속되었고, 양측의 화의와 오다 군의 완전한 철수는 다음 해인 에이로쿠 5년( 1562년 ) 2월에야 이루어졌다.
같은 해인 1562년에는 사이토 가문의 유력 가신이자 구조 하치만 성의 성주였던 엔도 모리카즈마저 병으로 사망하여 다쓰오키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2. 2. 미노국 공방전과 패주
아버지 기룡의 뒤를 이어 1561년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은 사이토 다쓰오키는 오다 노부나가와 격렬한 경쟁 관계에 놓였다. 다쓰오키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사이토 도산)와 달리 유능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쓰오키는 노부나가의 침공에 대비하여 아버지 대부터 적대 관계였던 북 오미의 아사이 나가마사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노부나가가 먼저 아사이 나가마사와 동맹을 맺으면서 오히려 아사이 가문이 미노를 침공하게 되었다. 다행히 당시 동맹 관계였던 롯카쿠 요시카타가 아사이 영지를 침공하면서 아사이 군은 철수했다.
1563년(에이로쿠 6년), 다시 침공해 온 오다 노부나가와 신가노에서 전투를 벌여 가신 다케나카 시게하루의 활약에 힘입어 오다 군을 격파하기도 했다(신가노 전투). 그러나 1564년(에이로쿠 7년) 2월 6일, 다케나카 시게하루와 그의 장인 안도 모리나리가 이나바야마 성을 점거하고 다쓰오키를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쓰오키는 우카이야마 성 등으로 피신했다가 같은 해 10월경 이나바야마 성으로 복귀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미노 국내 영주들 사이에서 다쓰오키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는 1562년경부터 고마키 산성을 축성하며 미노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 이에 동미노 지역의 유력 영주인 이치하시씨, 마루모씨, 타카기씨 등이 오다 가문에 투항했다. 1565년(에이로쿠 8년)에는 오다 가문에 항복한 카지타 성주 사토 타다요시가 도도 성주 키시 노부치카를 토벌했으며, 세키 성주이자 다쓰오키의 숙부인 나가이 미치토시마저 오다 가문의 무장 사이토 토시하루에게 패배하면서 주고쿠 지방도 노부나가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8월에는 미노 방어의 요충지였던 이누야마 성마저 함락되었다.
1566년(에이로쿠 9년), 오미국에 망명 중이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자신의 상락(교토 입성)을 돕도록 요청하며 다쓰오키와 노부나가에게 화목을 명했고, 양측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노부나가는 미노 국경으로 군대를 진군시켰고, 윤8월에 다쓰오키 군과 충돌했다(코노시마 전투). 이 전투에서는 다쓰오키 군이 승리하여 노부나가 군은 많은 익사자를 내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이 시기 다쓰오키는 오다 가문에 대항하기 위해 가이의 다케다 신겐과 동맹 교섭을 진행했으나, 노부나가 역시 다케다 가문과 교섭하고 있었기에 다케다 가문은 중립을 지켰고, 노부나가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 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1567년(에이로쿠 10년), 니시미노 삼인중으로 불리던 이나바 요시미치, 우지이에 나오모토, 안도 모리나리가 노부나가에게 내응하면서 상황은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결국 이나바야마 성은 노부나가에게 함락되었다. 성 함락 당시 다쓰오키의 행적에 대해서는 최소 두 가지 설명이 전해진다. 하나는 노부나가의 최후 공격 전날 밤, 성을 버리고 배를 타고 나가라강을 따라 도주했다는 설이다.[1] 다른 하나는 성의 정문이 돌파된 후, 히데요시가 보낸 사자가 항복하면 관용을 베풀겠다는 제안을 했고, 다쓰오키가 이를 받아들여 가솔들과 함께 성을 나섰다는 설이다.[2]
어느 쪽이든, 다쓰오키는 8월 15일(혹은 9월) 성 아래 기소강을 배로 내려가 북 이세의 나가시마로 도주했다.[3] 이 패배로 사이토 가문은 센고쿠 시대의 주요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다쓰오키는 다시는 다이묘로서 미노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그는 잠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의탁했다.[3]
2. 3. 오다에의 반항
1567년 오다 노부나가에게 이나바야마성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다쓰오키는 나가시마, 이세국으로 피신했다.[3] 이후 기나이로 이동하여 당시 노부나가와 대립하던 미요시 산닌슈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에이로쿠 12년(1569년) 1월, 미요시 산닌슈는 노부나가가 옹립한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혼코쿠지에서 습격했다(혼코쿠지 변). 다쓰오키 역시 나가이 미치토시와 함께 이 공격에 가담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노부나가 공기』, 『당대기』). 이는 다쓰오키가 본격적으로 노부나가에 대한 저항 활동에 나섰음을 보여준다.
이듬해인 겐키 원년(1570년) 8월에는 노다 성・후쿠시마 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다쓰오키는 미요시 야스나가, 아타케 노부야스, 소고 마사야스 등과 함께 이시야마 혼간지의 법주 게뇨의 편에 서서 농성하는 미요시 산닌슈를 지원했다.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후 공격 위협으로 인해 퇴각할 때까지 이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러한 반 노부나가 활동에도 불구하고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다쓰오키는 결국 에치젠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는 1573년 도네자카 전투에서 아사쿠라군 소속으로 싸우다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
2. 4. 최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이나바야마성을 빼앗긴 1567년 이후, 다쓰오키는 성에서 쫓겨났다. 그가 성을 탈출한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전해진다. 하나는 마지막 공격 전날 밤 성을 몰래 빠져나와 배를 타고 나가라강을 따라 도망쳤다는 설이다.[1] 다른 하나는 성문이 돌파된 후, 히데요시가 보낸 사자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여 노부나가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을 나섰다는 설이다.[2]성을 나온 다쓰오키는 이세국의 나가시마로 피신했다. 잠시 망명 생활을 하다가[3] 에치젠 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몸을 의탁했고, 객장으로 대우받았다고 전해진다.
1571년 8월, 혼간지의 켄뇨는 다쓰오키에게 서신을 보내 미노 탈환을 격려하며 금과 칼을 선물했다.[8] 이듬해인 1572년에는 아사쿠라 가문과 에치젠, 미노의 혼간지 문도들의 지원을 받아 미노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다쓰오키는 북쪽(에치젠)에서, 나가시마 문도들의 지원을 받는 히네노 히로나리는 남쪽(이세)에서 미노를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9] 실제로 그해 겨울 작전을 실행하려 했으나, 아사쿠라 군이 눈 때문에 에치젠으로 철수하면서 다쓰오키의 미노 복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7]
덴쇼 원년(1573년) 8월, 다쓰오키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따라 아자이 나가마사를 구원하기 위해 오미 북부로 출진했다. 그러나 8월 14일, 도네자카 전투에서 아사쿠라 군은 오다 군에게 크게 패했고, 다쓰오키는 도주 중 추격을 받아 전사했다.[1][4] 향년 26세 또는 27세의 나이였다.[7] 일설에는 과거 자신의 가신이었던 우지이에 나오모토의 아들 우지이에 나오마사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도 한다.
법명은 즈이운안 류코 거사(瑞雲庵竜興居士)로 알려져 있으나, 『죠자이지 기록(常在寺記録)』에는 즈이코인 류엔 소운 닛슈 대거사(瑞光院竜淵宗雲日岫大居士)라고 기록되어 있다.
2. 5. 생존설
혼간지 세력과 연관된 생존설이 몇 가지 전해진다.2. 5. 1. 엣추규우미기몬(越中の九右ェ門)
도야마시 흥국사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다쓰오키는 전사하지 않고 가보와 계도를 가지고 에이로쿠 12년(1569년) 3월 엣추국 신카와군 누노이치 촌으로 와 흥국사에 몸을 숨겼다고 한다. 천하의 정세를 살핀 다쓰오키는 가문 재흥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구에몬(九右ェ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근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처의 힘, 경의 힘이다"라고 일족을 격려하며 개척에 힘썼고, 마침내 그 땅에 정착했다.노부나가와 혼간지 세력 간의 이시야마 전투가 끝난 덴쇼 8년(1580년), 구에몬은 자신이 개척한 땅을 '쿄리키(経力) 촌'이라 이름 지었다.
에도 시대로 접어든 게이초 16년(1611년), 구에몬은 아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초고(草稿)를 가지고 누노이치 흥국사에서 출가하여 주지가 되었다. 흥국사에는 다쓰오키가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갑옷 안장과 염지불(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 입상)이 남아 있다.
구에몬은 간에이 9년(1632년) 6월 19일에 86세(혹은 85세)의 나이로 열반했으며, 그의 묘는 도야마시 쿄리키의 혼세이(本誓寺) 사 앞에 있다고 전해진다.
구에몬의 자손들은 분세이 3년(1820년) 11월, 엣추국 신카와군 오이즈미 촌(현 도야마시 오이즈미)으로 이주했으며, 이후 다이쇼 2년(1913년) 11월에는 도야마현 신카와군 호리카와 촌 코이즈미(도야마시 호리카와 코이즈미)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한편, 키노시타 사토시는 겐나 9년(1623년)에 흥국사 주지가 되었다는 전승을 토대로 볼 때, 당시 다쓰오키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인물은 다쓰오키 본인이 아니라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2. 5. 2. 하시마의 전승
도네자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본願寺와 합류했다는 전승이 있다. 사이토 다쓰오키(류코)는 이시야마 혼간지로 도망쳐 본원사 세력과 함께 재기를 도모했지만, 현재 기후현 하시마시 아시치카 정에 있는 절에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지역의 간쿄지에는 다쓰오키의 묘와 그의 아버지인 요시타츠, 그리고 다쓰오키의 아들로 여겨지는 고헤이 요시히토의 위패가 전해지고 있다.토키 킨센의 『고본 미노지』[11]에는 다쓰오키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싸운 후, 덴쇼 8년(1580년) 화의가 성립되자 미노 하시마군 아시치카 촌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덴쇼 10년(1582년) 5월 5일에 자결했으며,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알게 된 승려 료간이 이세 나가시마에 있던 간쿄지를 아시치카 촌으로 옮겨 사찰을 건립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3. 인물·일화
아버지 요시타쓰가 할아버지 도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외가인 잇시키(一色) 성을 칭했던 것처럼, 다쓰오키 자신도 잇시키 성을 사용했다. 기노시타 사토시는 '잇시키'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다쓰오키 관련 사료가 많이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한다.[16] 또한 미노 국주 시절에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기토(義洞)'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사이토 가문 시절부터 내려오던 가신들의 성씨를 잇시키 가문의 가신단 성씨로 바꾸게 하기도 했다.[17] (히네노 히로나오가 잇시키 씨 슈고다이였던 엔나가 씨를 칭한 것이 그 예이다.)
다쓰오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다. 『포안 노부나가기』[13]에서는 아첨하는 자를 중용했다고 기록하고, 『노인잡화』는 "지극히 어리석은 자", 『동도군기』[14]에서는 정치가 올바르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당한 다이묘로서, 노부나가의 뛰어남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낮게 평가된 측면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더욱이, 이나바야마 성을 빼앗은 다케나카 시게하루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포안 태합기』 이후 그를 높이 평가하는 과정에서, "주군 다쓰오키에게 간언하기 위해서였다"는 명분을 만들면서 다쓰오키가 어쩔 수 없이 어리석은 군주로 묘사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엣추(도야마현)에 정착했다는 설과 관련하여, 도야마시에는 다쓰오키(통칭 규에몬)가 학의 도움으로 발견했다는 유래를 가진 '영학원천(霊鶴源泉)'이라는 광천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온천은 '교료쿠노유(経力の湯)'라 불리며 오랫동안 이어졌고, 후에는 우라가미 4번 붕괴 사건으로 체포된 숨은 크리스찬들이 보내지기도 한 역사가 있다. 이 온천은 다이쇼 6년(1917년)에 폐업했으며, 그곳에 모셔져 있던 목조 약사여래상은 현재 도야마시 혼쇼지(本誓寺)에 안치되어 있다. 도야마번의 9대 번주였던 마에다 토시모토가 소장했다고 전해지는 교료쿠노유의 겨울 풍경을 그린 그림이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 남아있다.
다쓰오키는 기나이에 머물던 시기 크리스찬에 관심을 보인 기록이 남아 있다.
-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다쓰오키가 크리스트교 교리나 세계 창조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일일이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 번 교회 방문 시 들었던 내용을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유창하게 반복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적었다. (다만, 프로이스가 "매우 유능하고 사려 깊다"고 평가한 대상은 다쓰오키 본인이 아니라 그의 의붓동생이라는 지적도 있다.)
- 선교사 가스파르 비레라에게 "인간이 데우스(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데, 왜 세상에는 불행이 가득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가? 만물의 영장이라면 왜 세상이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현세에서 보상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와 같은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비레라는 다쓰오키가 납득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녀에 대한 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내에 대해서는, 『미농국제구기』, 『미농국명세기』가 아사이 나가마사의 딸이라고 하지만, 연대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속군서유종』에 수록된 「잇시키 계도(一色系図)」[12]는 아사쿠라 카게노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숙부)의 딸을 타츠오키의 아내로 기록하고 있다.
참조
[1]
간행물
Soda
1991
[2]
간행물
Dening
1904
[3]
간행물
Ohta
2003
[4]
서적
The Chronicle of Lord Nobunaga
Brill
1610
[5]
서적
『美濃国諸旧記』より
[6]
서적
『武家事紀』より
[7]
논문
元亀年間の斎藤龍興の動向
2016
[8]
문서
元亀2年8月23日付「顕如御書留」『大系[[浄土真宗|真宗]]史料文書記録編4』43号
[9]
문서
「岐阜県立図書館所蔵文書」『岐阜県史資料編古代・中世補遺』8号
[10]
문서
天正元年正月27日付「顕如御書留」『大系真宗史料文書記録編4』84号
[11]
웹사이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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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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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下部系図(別本)
https://www.digital.[...]
국립공문서관 디지털아카이브
2024-06-20
[13]
웹사이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https://dl.ndl.go.jp[...]
202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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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https://dl.ndl.go.jp[...]
2024-06-20
[15]
웹사이트
信長戦記
https://www.leed.co.[...]
[16]
문서
오다 노부나가가 잇시키 성씨로 개칭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 적도 있다.
[17]
문서
히네노 히로슈가 잇시키씨 수호대의 노부나가씨를 자칭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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